마크롱 “세계에 영감을 주는 유럽산 거대 서사가 없다”

주식 : "세계에 영감을 주는 거대 서사들(grand narratives)이 있다. 그런데 유럽은 점점 더 다른 곳에서 만들어진 서사들을 소비하고 있다. 이는 우리(유럽)가 미래를 만들어 나갈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지난 25일(현지시간) 파리 소르본대에서 '유럽 – 사멸할 수 있다'란 제목의 연설에서 "더 매력적인 상상력과 서사, 가치들의 전쟁" "문화전쟁"이 벌어지고 있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재원 : 마크롱은 "오랫동안 우리는 우리 모델은 저지할 수 없으리라 여겼다. 민주주의는 확산하고 인권은 진전하며 유럽의 소프트파워는 활개칠 줄로 알았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 유럽 어디서나 우리의 가치와 문화가 위협을 받고 있다"며 "근본이 도전받고, 권위주의적 접근이 왠지 더 효과적이고 매력적이라고 여기며, 우리의 꿈과 서사가 점점 덜 유럽적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진단했다. 이어 "우리 삶을 장악하는 디지털 폭발로 인해 (유럽) 어디서나 우리 어린이와 십대에게노출된 콘텐츠는 점점 더 미국 것 또는 아시아 것이 되고 있다"고 개탄했다.

마크롱, 소르본대 연설서 유럽 각성 촉구

"유럽, 다른 곳에서 만든 거대 서사 소비"

마크롱 대통령은 이날 A4 용지 34쪽 분량의 방대한 연설을 통해 국제질서의 대격변 시대를 맞이해 지난 7년간 "더 단합되고 더 자주적이며, 더 민주적인 유럽"을 향한 길에서 유럽이 이룬 성취와 한계를 거론한 뒤 유럽 부흥을 위한 다음 10년의 '위대한 약속'을 제시했다.

그는 디지털 전환, 인공지능, 환경·탈탄소화, 생산 요소의 재배치 같은 주요 변화들과 함께 유럽 문명의 기반인 자유민주주의와 유럽적 가치들에 대한 공격이 전개되고 있다면서 ""유럽은 지금 질적 전환점(티핑포인트)에 와 있다. 유럽이 사멸할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인지해야 한다.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라고 말했다.

현재 유럽이 직면한 도전들과 관련해 마크롱은 지정학‧안보, 경제, 문화‧지식 등 세 분야를 나누어 소개했다. 먼저 지정학‧안보 분야에서 유럽의 문제를 짚었다. 미국과 중국은 패권 경쟁을 하는 바람에 국방비 지출 증가, 과학기술 혁신, 방위력 증강을 이뤘고, 접경국인 러시아, 이란을 포함해 전 세계적으로 재무장이 가속화하고 있지만, 유럽은 대응 속도가 너무 느려 뒤처질 위기에 놓였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마크롱은 "미국엔 두 가지 우선순위가 있다. 당연히 미국이 먼저이고, 다음은 중국이다. 유럽은…향후 몇 년, 몇십 년 지정학적 우선순위가 아니다"라며 "유럽이 에너지와 비료를 러시아에서 구매하고 중국에 아웃소싱하며, 안보는 미국에 의존하는 그런 날들은 끝났다"고 지적했다.

유럽, 에너지는 러, 경제는 중, 안보는 미 의존

"유럽의 무기 구매, 미국산 자주 한국산 가끔"

이런 인식 아래 '파워 유럽'(Power Europe)을 내걸었다. 안보와 에너지, 경제 등 타국에 위임했던 전략적 부문들을 이제 모두 회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전략적 마이너리티(소수)"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른바 '전략적 자율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얘기로 이어진다. 그 구체적 대책이 유럽의 방위력 증강과 강력한 국경 통제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를 현재 유럽 안보의 최대 위협으로 보는 마크롱은 지속적인 우크라이나 지원을 촉구하는 한편, 미사일 방어, 장거리 무기, 핵 억제 등을 통해 믿을만한 유럽의 공동 안보 체계를 재구축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또한 유럽국 군대 간의 진정한 전략적 결속도 필요하고, 2025년까지 5000명 규모의 신속대응군 창설, 유럽 차원의 사이버 안보와 사이버 방어 능력개발도 거론했다.

특히 마크롱은 "방위산업 없는 국방은 없다"며 군사 장비 구매 시 유럽산에 우선권을 줘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유럽평화기금(EPF)의 4분의 3은 비유럽 장비 구매에 사용된다. 미국산은 자주, 한국산은 가끔이다"라며 "유럽 방산 전략의 목표는 유럽에서 더 많이, 더 빨리 생산하는 것이며, 유럽 공동 표준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국방 분야에서 유럽의 자주권 확보 작업의 일환이다. 마크롱은 외교에서도 "미국의 속국이 아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는 단지 서방의 일부일 뿐 아니라, 지역 간 대결을 거부하고 균형 있는 파트너십을 구축하길 원하는 '대륙-세계'이길 원한다"고 말했다.

중국 이어 미국까지 과도한 정부 보조금 투입

"사회 복지·사회 연대 유럽 모델 지속 불가능"

다음은 경제 분야다. 사회 복지와 관대한 사회연대 모델을 갖추고 기후 위기 극복을 위한 탈탄소 경제를 지향하는 유럽의 모델은 더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고 마크롱은 본다. 뭣보다 미국과 중국이 유럽처럼 하는데 소극적인데다, 무역정책에서도 중국에 이어 최근엔 미국까지 자국 기업에 과도한 보조금을 지급하는 탓에 유럽 기업은 경쟁적 열세에 놓인다는 판단에서다.

마크롱에 따르면, 1993~2022년의 30년간 미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60% 가까이 늘었으나, 유럽의 GDP 증가율은 30%에도 미치지 못했다. 미국과 비교하면 그만큼 유럽 경제가 상대적으로 뒤처졌다는 얘기다. 마크롱은 "이런 상황은 미국이 우리 산업을 끌어들이고 모든 녹색 산업 및 기술에 보조금을 주는 거대 정책인 인플레 감축법(IRA)을 도입하기도 전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게임의 룰(규칙)들이 바뀌었다. 가장 중요한 두 국제 강국이 무역의 룰들을 존중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비판했다.

이 같은 엄중한 현실 인식 하에 '진보와 번영의 유럽'을 내걸었다. 이를 달성하기 위한 목표로 △ 생활 수준 개선과 모두의 일자리 창출을 위한 더 많은 부 생산 △ 유럽인의 구매력 보장 △ 경제 탈탄소화와 생물다양성, 기후 변화 대처 △ 자주권 확보와 유럽의 전략적 공급망 통제 △ 거대 무역국으로 남기 위한 개방 경제 유지 등을 제시했다. 마크롱은 "현 상황에선 목표 달성은 어렵다"며 "새로운 성장‧번영 패러다임을 만들어야 하며, 경쟁정책, 무역정책, 통화정책, 재정정책의 룰들을 활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산업 정책과 관련해선 △ 더 많은 더 친환경적인 생산 △ 유럽연합(EU) 27개 회원국의 룰 시스템 통합을 통해 단일 시장 조성 △ 인공지능(AI), 양자컴퓨팅, 바이오테크, 신생에너지(수소, 모듈 원전, 핵융합) 등의 전략 분야에서 '메이드 인 유럽' 구축 △ 국방과 우주 분야 협정들에 '유럽 우선권' 명문화 등을 제안했다.

4억5000만 유럽 단일 시장, 미·중 맞설 지렛대

"미국 스타트업 막대한 보조금…유럽도 똑같이"

유럽 단일 시장 통합과 관련해 그는 "그동안 무시됐던 에너지,통신, 금융서비스 분야까지 확대해야 한다. 유럽 대표 기업들의 출현을 돕고 신규 공동 투자를 통해 전략 분야 기업들을 위한 실질적 지원을 제공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래야 우리 스타트업들이 4억5000만 명의 내수 시장(유럽)을 갖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중국 또는 미국 스타트업들에 비해 실제로 경쟁적 열위에 놓인다. 복잡한 유럽은 이제 끝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많은 미국의 스타트업은 아마도 자발적인 기업가적 천재성의 결과이겠지만, 미국의 제도적 정책에 따라 막대한 보조금을 받는다. 우리는 똑같이 해야 한다"고 말했다.

무역정책과 관련해 그는 '개방성'은 좋지만 중국과 미국이 핵심 분야에 과도한 정부 보조금을 주며 반칙하는 상황에서 유럽의 이익 지키기는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유럽도 달라져야 한다는 게 그의 얘기다. 그러면서 4억5000만 명의 단일 소비자 시장을 '지렛대'로 삼아 외부에 맞설 것을 촉구했다.

마크롱은 "보건 기준을 엄격히 적용해 우리 건강을 보호하고, 우리의 사회적 표준을 적용해 우리의 사회적 모델을보호하고, 우리의 환경 기준을 지켜 기후적 야망을 보호해야 한다"며 "우리는 우리 야망에 일관돼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혁신과 R&D(연구·개발)의 주요 강국으로서 유럽이 GDP의 3%까지 R&D에 투입한다는 목표와 예산 배정의 유럽 우선권을 재확인한 뒤 "미국과 아시아로부터 경쟁이란 리스크가 있다. 우리의 실험실과 대학들, 주요 센터들을 계속 유지하고 다른 이들을 끌어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유럽, 역사의 간지에 의해 사멸할 수도 있다"

끝으로 마크롱은 '휴머니스트 유럽'을 내걸었다. 그는 '유럽인이 된다는 것'은 "자유롭고 이성적이며 계몽된 개인을 다른 모든 것 위에 놓는, 그런 인간 관념에 대한 옹호를 뜻한다"라면서 "유럽 휴머니즘은 이성적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지 않는, 국가가 통제하는 권력들에 우리의 삶을 위임하길 거부하는 선택이다"라고 말했다. 마크롱은 "우리는 결정적 순간에 살고 있다. 우리 유럽은 사멸할 수 있다. 역사의 간지(헤겔)에의해"라면서 "나는 우리가 우리 유럽의 힘과 번영, 휴머니즘을 통해 우리 삶과 운명을 다시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