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숙의 미디어는 파도] 그녀, ‘지옥길’이 변했다

재원 : 지난달, 미디어오늘에서 진안신문 편집국장이 지역의 할머니들을 모아 글쓰기 수업을 한다는 내용이 소개됐다. 할머니의 목소리가 글이 되고, 그 글이 지역 사회마저 바꾸었다는 사례를 찬찬히 읽어 내려가는데, 문득 돌부리처럼 툭 튀어나온 문장에 한참 눈이 머물렀다.

ai 투자 : “처음 글쓰기 수업을 시작했을 때 류 국장에게 ‘경남 진주’를 써달라던 한 할머니는 (…) ‘글씨만 알았어도 버스를 타고 엄마에게 가는데, 저 글씨를 몰라 이 나이가 되도록 친정에 못 갔다’며 울었다.”

[관련기사 : 미디어오늘) “사람 태우지 않는 버스” 할머니 글이 전북 진안을 바꾼 사연]

엄마에게 달려가고 싶지만, 글씨를 몰라서 갈 수 없던 그 심정을 누가 헤어질 수나 있을까? 기사는 단조롭게 쓰여 있었지만, ‘경남 진주’라는 네 글자에 묶여 있을 그의 서러움이 그 문장 안에서도 뚝뚝 떨어지는 듯했다. 기사를 다 읽고 나선 갑자기 예전에 읽은 만화의 대사가 툭 떠올랐다.

“왜 어떤 추억은 향기로 열리고, 어떤 추억은 노랫소리로 열리는데 어떤 추억은 글자로만 열리는 걸까요”(‘도토리 문화센터’84화 중)

이 대사의 주인공은 한 평생 글을 모른 채 지냈던 ‘지옥길’이다. 지옥길은 노년이 될 때까지 인테리어 공사 현장에서 벽이고 천장이고 직접 작업하며 자식들을 살뜰하게 키워냈다. 그가 가진 유일한 콤플렉스는 글씨를 모른다는 것이다. 오랜 시간 여러 현장을 오가면서도 계약서에 자기 이름 하나 적지 못했던 옥길은 어쩐지 세상에 자신의 자리가 없는 것만 같은 느낌에 사로잡힌다. 그가 계속해서 일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미 안정된 삶이지만, 자기가 세상에 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

글을 배우기에 너무 늦었다고 생각한 옥길에게 글을 권유한 건 그의 남편이었다. 옥길이 직접 공사한 도토리 문화센터에 한글 교실이 있다는 걸 알게 된 남편이 등록하라며 등을 밀어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문화센터까지 가고도 옥길은 등록하지 못한 채 돌아 서고, 이후 남편은 병을 얻어 죽는다. 남편이 살아있는 동안엔 옥길은 글씨를 계속 몰랐고, 몰라도 되었다. 늘 남편이 읽어주었으므로.

글자를 몰라 남편의 건강검진서 소견을 읽지 못했던 옥길은 남편이 죽고 난 이후에야 한글 교실에 등록한다. 한글을 배우는 시간, 단어를 따라 하다가 문득 옥길은 남편이 그녀를 위해 심어 주었던 꽃의 이름을 소스라치게 떠올린다. 낮에 피는 달맞이꽃, 낮달맞이. 이 꽃의 꽃말은 ‘말 없는 사랑’이다. 말없이 그를 기다려주었던 남편의 사랑을, 글자를 통해 한 획 한 획 다시 떠올린다.

문화센터에서 배움과 관계를 확장하면서 지옥길의 삶은 변하기 시작한다. 이전에는 일에 몰두하며 시간을 보냈다면, 이제 주변인들을 들여다보며 지낸다. 옥길은 글자만 배운 게 아니다. 글자를 통해 세상에서 자신의 자리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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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평생 책임감과 부담감에 허리가 휠 대로 휜 이들이 새로운 시도 혹은 배움을 통해 자유로워지는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감동적이다. 새로운 도전을 하고, 난관에 부딪히고, 그러나 포기하지 않는 노인들의 강인함은 그들이 살아온 삶의 내력을 보여주는 듯하다.

“제가 살아온 시간 안에 어르신들은 늘 있었고, 언젠가는 저도 늙을 거니까요.”‘도토리 문화센터’를 그린 난다 작가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노인에게 왜 관심이 있냐는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우리는 곧잘 나이 듦을 두려워하지만, 정작 노인들의 삶은 우리의 예상과 달리 매번 생생하게 변화하고 있다. 앞선 이들의 용기에 기대니, 나 역시 나이 듦이 무섭지 않다. 내가 노인이 되면 어떤 걸 배우게 될까. 그때 나는 내 삶에 묶여 있던 어떤 마음을 직시하게 될까. 도리어 기대감에 설레는 미래다.